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핀란드 내전 (문단 편집) === 적위대의 종말과 종전 === 헬싱키 전투에서 패배한 적군 수뇌부 인민대표단은 병사들을 나몰라라 하며 4월 25일 전장에서 탈출했다. 병사들 중 일부는 그들을 따라 [[페트로그라드]]로 갔지만 대부분은 끝까지 백군에 맞서 싸우다 궤멸되었다. 최후의 적위대 수천 명과 적군에 동조한 민간인 2만 여명이 4월 말에서 5월 초에 거쳐 러시아 방향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4월 28일 해메 남부 쉬랜타카에서 적위대는 일시적으로 독일군을 패퇴시켰다. 독일군의 전열을 뚫은 예봉에는 놀랍게도 여성 적위대원들이 서 있었다. 독일 사단장 폰 데어 골츠 백작은 "이 핀란드 여자들만큼 맹렬하게 공격해오는 프랑스 남자를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핀란드 여자들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 프랑스 남자를 까는 거 같지만 일단 넘어가자-- 하지만 결국 그들은 5월 1일에서 2일로 넘어가는 밤에 라흐티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되었고 3만 명 안팎이 포로로 잡혔다. 5월 9일, 핀란드 백군은 적법한 재판도 없이 이들 중 500명을 숲속으로 끌고가 [[기관총]]을 난사해 즉결처형했다. 적위대 초대 총사령 알리 알토넨도 여기서 살해되었다. 처형된 사람 중 200여명은 여성 적위대원이었는데 남자들은 소대장 이상 간부급만 총살당했지만 여자들은 간부급이 아닌 단순참여자라도 전투원으로 판단되면 모두 살해되었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백군은 그 기준을 바지를 입었는지, 머리카락을 숏컷을 했는지 여부로 판단했다. 그 자리에서 살해되지 않은 사람들도 포로수용소에서 학대를 당한 끝에 만 명 이상이 죽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여성들은 일단 모두 [[강간]]당했고 이후에도 굶어죽지 않기 위해 포로수용소 위병들에게 [[성상납]]을 해야 했다. 핀란드 백군의 이런 잔혹행위에는 여성의 정치적 주체성을 비정상으로 이해하고 사회를 위해 그 비정상적인 존재들을 지워버려야 한다는 [[우생학]]적 관념이 개입되어 있었다. --아직 그렇게까지 미치지는 않았던-- 독일군은 핀란드 백군의 살육을 제지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강간은 독일군도 똑같이 저질렀다.(...) 한편 남서쪽에서는 [[에로 하팔라이넨]][* [[단체협약]] 개념을 고안한 사람이다. 소련 도피 이후 핀란드 공산당에 참여했지만 1935년 민족주의자라는 구실로 제명당하고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총살되었다.] 등 극소수 지도부가 핀란드 동부의 중심지 비푸리에서 병사들과 함께 극렬히 저항했지만 그 비푸리마저 4월 29일 떨어지면서 적군의 대형 거점은 모두 함락되었다. 하팔라이넨도 5월 1일 모터보트를 타고 러시아로 도피했다. 적군의 수중에 있던 핀란드 남서부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코우볼라]](Kouvola)와 [[코트카]](Kotka)는 5월 5일 항복했다. 카리알라 지협의 러시아 해안포대를 백군이 5월 15일 점령하면서 적군과의 평화협상 뭐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적군 궤멸로 내전이 종료되었다. 만네르헤임과 백군은 5월 16일 헬싱키에서 군대 행진을 하며 승리를 자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